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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징직조

인간의 인식 방법 : 추상화

1. 문제의식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머릿속에 담을 수 없다.

우리는 거대한 수, 무한, 원자, 파동함수, 시공간, 엔트로피, 고차원 데이터 같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떠올리지 못한다. 대신 그것들을 기호, 수식, 개념, 모델, 은유, 구조로 바꾸어 다룬다.

즉 인간의 이해는 현실 자체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다룰 수 있는 추상화된 표현 객체로 변환하는 과정에 가깝다.

인간은 세계를 직접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다룰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어 이해한다.

 

2. 인간은 대상을 직접 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주 큰 수를 생각해보자.

10^{10^{100}}

인간은 이 수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수의 모든 자릿수를 머릿속에 펼쳐 놓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다루는 것은 숫자 전체가 아니라,

“10을 10^{100}번 거듭제곱한 수”

라는 압축된 기호 구조다.

마찬가지로 무한도 그렇다.

1,2,3,4,…

여기서 ...는 실제 무한한 항목을 전부 나열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규칙이 계속된다”는 유한한 기호다.

즉 인간은 무한을 머릿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가리키는 규칙을 다룬다.

 

3. 추상화란 무엇인가

추상화는 복잡한 대상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필요한 구조만 남기는 방식이다.

현실은 너무 복잡하다.

하나의 사과를 완전히 설명하려면 다음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 원자와 분자 구조
  • 색과 빛의 반사
  • 질량과 형태
  • 맛과 냄새
  • 생물학적 성장 과정
  • 인간의 감각 반응
  • 문화적 의미

하지만 일상에서는 그냥 “사과”라는 개념으로 압축한다.

과학에서는 더 정교하게 압축한다.

F=maF = ma

이 식은 물체의 모든 성질을 담지 않는다.
대신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핵심 관계만 남긴다.

즉 추상화는 현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다룰 수 있는 구조를 남기는 행위다.

 

4. 추상화의 기본 흐름

인간의 인식은 대체로 다음 흐름을 따른다.

현실 대상→관측→기호화→수식화→모델→조작 가능성

우리는 현실을 직접 조작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이 남긴 관측값을 기호화하고, 그 기호를 계산 가능한 구조로 바꾼다.

예를 들어 행성 운동을 생각해보자.

현실의 행성은 거대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과학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바꾼다.

F=G_(m1m2) / r^2

이 식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행성의 운동을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과학 공식은 현실의 복사본이 아니라,

현실에서 반복되는 구조를 인간이 조작 가능한 형태로 압축한 것

이다.

 

5. 과학은 좋은 추상화의 역사다

과학의 발전은 단순히 더 많은 사실을 모은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어떤 표현을 쓰면 복잡한 현상이 단순해지는가?

과학의 큰 전환은 대개 새로운 표현 방식의 등장과 함께 일어났다.

5.1 뉴턴역학: 운동을 힘으로 표현하다

뉴턴역학은 운동을 힘, 질량, 가속도라는 개념으로 압축했다.

F=ma

현실의 운동은 복잡하지만, 이 식을 통해 많은 현상을 하나의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이 단순한 계산 변수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새로운 인식의 창이 되었다는 점이다.


5.2 라그랑지안과 해밀토니안: 힘에서 구조로

이후 물리학은 힘을 직접 추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에너지, 작용, 상태공간 같은 더 추상적인 표현으로 나아갔다.

δS=0

이 표현은 운동을 단순히 “힘이 밀어서 움직인다”로 보지 않는다.
대신 가능한 경로들 중 작용이 안정되는 경로를 실제 운동으로 본다.

이것은 단순한 계산법의 변화가 아니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의 변화다.


5.3 푸리에 변환: 시간에서 주파수로

복잡한 신호를 시간 영역에서 그대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푸리에 변환을 사용하면 신호를 주파수 성분으로 분해할 수 있다.

f(t)→f^(ω)

이때 우리는 신호를 없앤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표현 공간으로 옮긴 것이다.

시간 영역에서는 복잡해 보이던 구조가
주파수 영역에서는 단순한 패턴으로 드러날 수 있다.

즉 좋은 추상화는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구조가 더 잘 보이는 창을 제공한다.


5.4 양자역학: 상상할 수 없는 대상을 수학적으로 다루다

양자역학은 인간 직관으로 직접 떠올리기 어렵다.

입자는 파동처럼 행동하고,
상태는 중첩되며,
측정은 확률적으로 나타난다.

이 세계를 고전적 그림으로 직접 이해하려 하면 막힌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새로운 표현을 도입한다.

∣ψ⟩|

 H^

 x^,p^

입자의 궤적을 직접 상상하는 대신,
상태벡터와 연산자라는 추상 객체를 사용한다.

이것은 미시 세계를 그림처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시 세계를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 구조로 옮긴 것이다.

 

6. 추상화는 힘이자 한계다

추상화는 인간 인식의 가장 강력한 도구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추상화=능력의 확장+인식의 제약


6.1 추상화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한다

인간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을 추상화를 통해 다룬다.

  • 무한
  • 원자
  • 블랙홀
  • 파동함수
  • 고차원 공간
  • 확률분포
  • 엔트로피
  • 알고리즘
  • 신경망 내부 표현

이런 것들은 감각적으로 직접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수식, 모델, 기호, 그래프,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것들을 다룬다.

즉 인간은 세계를 직접 담지 못하기 때문에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압축된 표현으로 바꾸기 때문에 강하다.


6.2 추상화는 인식을 제한한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선택하는 순간,
그 표현이 잘 보여주는 것과 가려버리는 것이 생긴다.

예를 들어 뉴턴역학은 거시적 저속 세계에서는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미시 세계나 빛에 가까운 속도에서는 한계를 가진다.

그 이유는 단순히 계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세계에 대한 표현 방식 자체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데이터를 픽셀로 보면 색과 형태는 잘 보이지만,
그 물체의 냄새, 질량, 촉감, 역사적 맥락은 사라진다.

즉 표현은 대상을 열어주는 동시에 가둔다.

 

7. 기호를 실재로 착각하는 문제

추상화가 강력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현실 자체처럼 느끼기 쉽다.

예를 들어 파동함수 ψ는 양자 상태를 계산하는 데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인지,
아니면 관측 결과를 예측하는 계산 도구인지는 해석의 문제가 된다.

수학적 모델이 너무 잘 맞으면,
우리는 모델과 세계를 혼동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험이다.

모델은 세계가 아니다.
모델은 세계를 다루기 위해 만든 창이다.


8. 현대 과학은 직관 가능한 이해에서 조작 가능한 이해로 이동했다

고전적인 이해는 보통 머릿속 그림과 가까웠다.

공이 굴러간다.
힘이 작용한다.
물체가 궤도를 돈다.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 갈수록 이런 직관은 약해진다.

양자역학, 일반상대성이론, 통계역학, 현대 수학, 딥러닝은 모두 그렇다.

우리는 그것들을 완전히 그림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수식적으로 계산하고, 예측하고, 조작할 수 있다.

즉 현대적 이해는 점점 다음 방향으로 이동했다.

직관 가능한 이해→조작 가능한 이해

이것은 인간 인식의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직접 직관할 수 없는 대상을 다루기 위해 만든 더 강력한 방식이다.

9. 딥러닝도 추상화의 한 형태다

딥러닝도 현실을 직접 이해하지 않는다.

고양이를 인식하는 모델은 고양이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다.
고양이의 생물학, 물성, 냄새, 움직임, 존재성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먼저 센서를 통과한다.

현실의 고양이→카메라→픽셀→텐서→신경망\

모델이 다루는 것은 고양이 자체가 아니라,
고양이가 특정 관측 창에 남긴 표현이다.

이 점에서 딥러닝은 세계를 직접 푸는 기술이 아니다.

딥러닝은 세계가 특정 창 안에 비친 모습을 학습하는 기술이다.


10. 딥러닝의 창

딥러닝은 현실을 다음과 같은 창 안에 가둔다.

  • 픽셀
  • 토큰
  • 샘플링된 파형
  • embedding
  • tensor
  • floating point precision
  • GPU 메모리
  • 연산 그래프
  • loss function
  • 데이터 분포

그리고 그 안에서 안정적인 변환을 찾는다.

fθ:X→Y

이 변환은 현실의 전체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제한된 표현 공간 안에서 충분히 잘 작동하는 대응 관계를 학습한다.

그래서 딥러닝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취약하다.

창 밖의 것은 잘 모른다.

  • 데이터 분포 밖 상황
  • 관측되지 않은 원인
  • 센서가 담지 못한 정보
  • 잘못된 상관관계
  • adversarial pattern
  • causal structure

이런 문제는 딥러닝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투영된 표현을 학습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최종 정리

인간의 인식은 현실을 직접 복제하는 방식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를 관측하고, 자르고, 압축하고, 기호화하고, 조작 가능한 모델로 바꾼다.

이것이 추상화다.

추상화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을 다루게 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특정 표현 방식 안에 가둔다.

그래서 과학의 발전은 단순히 더 많은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다.
더 좋은 표현 체계를 발명하고, 기존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다.

가장 짧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세계를 직접 이해하지 않는다.
세계를 다룰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어 이해한다.

그리고 과학, 수학, 딥러닝, 컴파일러, 하드웨어 분석은 모두 이 구조 위에 있다.

이해란 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조작 가능한 추상화로 변환하는 능력이다.